박순성(서울특별시교육청 제23대 교육감 공약추진위원회, 위원장)
혁신미래교육의 계승과 교육 혁신
사회구성원 일반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교육은 사회제도로 정착하면서 사회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단순화하여 말하자면, 한국에서도 초·중등 공교육은 시대적 요구에 맞추어 변화해 왔다. 산업화를 국시로 내건 1960~80년대 개발연대는 공업입국의 시대이자 교육입국의 시대였으며, 나라를 세우기 위한 공교육의 핵심은 산업화 일군을 양성하는 일이었다. 1980년대 말 민주화 이후 공교육은 민주주의의 유지와 발전을 주도할 시민 주체를 형성하는 사회적 역할을 맡았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면서, 대중교육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형성되고 발현되는 방식과 교육을 이끄는 주체가 바뀌었다. 1990년대 말 선거를 통해 민주적 정권 교체가 실현된 이후 국가의 핵심 정책은 시민사회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국가가 주도하는 공교육도 큰 틀에서는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를 안정화하고 확장하고 심화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2000년대 후반부터 주민직선제로 선출되는 시·도 교육감은 시민사회로부터 올라오는 요구가 공교육의 현장에 직접 반영되도록 하는 전달자가 되었다. 서로 다른 정치지형 때문에 지역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존재하지만, 지난 15년 동안 민주시민교육은 확산되고 정치영역을 넘어 생활세계에서도 민주주의는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공교육 영역에서도 국가 역할의 축소와 시민사회 주도성의 강화에 따라 교육공동체 자치의 실현과 시민 참여의 확대가 주요한 과제로 등장하였다.
서울특별시교육청이 조희연 교육감 시기에 제시했던 교육비전은 민주화 이후 시민사회로부터 올라왔던 공교육의 이상을 잘 담고 있다. ‘모두가 행복한 혁신미래교육’(2018~18), ‘창의적 민주시민을 기르는 혁신미래교육’(2019~22), ‘다양성이 꽃피는 공존의 혁신미래교육’(2023~26)이라는 교육비전의 진화는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토대의 구축과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가치의 실현이 공교육의 핵심 목표임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혁신미래교육은 사회구성원 한 명 한 명이 도덕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나아가 사회경제적으로 동등한 존재로 존중받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우리 사회가 시대변화에 맞춰 포용과 연대의 민주사회로 더욱 발전해 가도록 기반을 닦는 일이 혁신미래교육의 이상이었다.
급작스럽게 실시된 보궐선거로 2024년 10월에 취임한 정근식 교육감은 1년 반 남짓 동안 한편으로는 혁신미래교육의 지향을 이어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초·중등 공교육에 대한 시민사회의 새로운 요구가 교육현장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교육 혁신을 확장하고 심화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미래를 여는 협력교육’이라는 서울교육의 비전은 이러한 이중적 과제에 대한 실천적 고민을 담고 있다.
시대 불안과 교육 걱정을 넘어서는 협력교육
교육 혁신의 확장과 심화는 혁신 자체를 변화하는 시대 상황에 끊임없이 다시 맞추어 가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혁신의 혁신 또는 ‘현재화’는 현존하는 사회질서의 모순이 누적될수록, 미래가 불확실할수록 더욱 긴요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모순과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지난 시기에 실현된 혁신의 성과가 왜곡되기도 하고, 수구와 퇴행이 혁신의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선거 시기는 이러한 도전이 불거지는 때이고, 지난해 교육감 선거도 마찬가지였다. 혁신미래교육은 선거라는 시민의 판결을 통과해야 했으며, 당연하게도 선거 이후에는 교육 혁신의 방향을 시민의 요구에 따라 변화시켜 나가는 고민을 하게 된다.
정근식 교육감의 공약추진위원회는 선거 과정과 결과에서 나타난 시민사회의 요구를 제대로 읽어내고 교육 혁신의 방향을 올바로 설정하기 위해서 ‘시대 불안’과 ‘교육 걱정’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에 주목했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초경쟁과 초격차, 기후 위기와 디지털 대전환이라는 지구촌 차원의 대격변 속에서 ‘시대 불안’과 ‘교육 걱정’이라는 두 현상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구성원 전체를 불안으로 내몬다. 이러한 불안은 미래세대 개개인 및 전체의 생존과 행복을 위한 교육에 대한 걱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교육 혁신의 방향 설정과 관련하여 공약추진위원회는 다양성과 공존이라는 혁신미래교육의 핵심 가치를 이어받으면서 21세기에 새롭게 강조되고 있는 미래역량인, 아니 인류의 가장 오래된 생존역량이라고 할 수 있는, ‘협력’에 주목하게 되었다.
‘협력교육’은 이 시대에 교육 혁신이 추구해야 할 내용들을 완전하게 담고 있지는 않지만 중첩된 위기와 극단적 분열에 직면한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시급하게 요구되는 교육 혁신임이 분명하다.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협력이 없다면 우리는 내전으로 치닫기 직전인 우리 사회의 갈등 상황을 결코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기후 위기나 디지털 대전환은 구태여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이미 협력은 우리 사회를 지켜낼 마지막 방어선이자 동시에 우리 사회에 가장 긴급한 생존역량이 되었다. 이 협력의 역량을 중심에 둔 교육이 바로 협력교육이다.
수사적으로 표현해 보면 협력교육은 ‘협력을 위한, 협력을 통한, 협력의 교육’을 실천해 나가는 사회적 활동이다. 협력 역량을 배우고 가르치는 과정에서 직접 협력을 실천함으로써 협력 자체가 교육이 되는 협력교육은 경쟁 자체가 교육이 되는 현재의 경쟁교육에 대비되는 교육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협력교육이 이루어지는 교육 현장에서는 말 그대로 가르침과 배움이 함께 성장해 나갈 것이다. 이러한 교육 혁신은 우리 사회를 붕괴로 몰아가고 있는 분열과 대립을 치유하고 초경쟁과 초격차의 질서를 연대와 포용의 관계로 전환하는 사회 혁신의 기반이 된다.
협력교육은 아직 체계화된 해설을 갖지 못했지만, 경쟁교육을 대신할 교육 혁신의 패러다임이라는 문제의식 차원에서 간단하게 특징을 정리해 볼 수 있다. 학생들이 스스로 미래를 열어갈 역량을 갖추어 나갈 수 있도록 교육공동체 구성원과 시민은 함께 교육의 주체가 되어 협력교육을 실천해 나간다. 이러한 협력교육에서는 참여와 소통, 자치와 연대, 협력적 문제 해결, 공동책무성과 자기주도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학생에서부터 교사, 부모, 그리고 시민까지 서로 다른 정체성과 이해관계를 가진 사회구성원 모두가 교육의 과정에 참여하고 또 협력함으로써 다양성은 창의의 기반이 되고, 이해관계의 차이와 갈등은 혁신의 원천이 된다.
협력교육이 성찰해야 할 문제
말은 아름답지만 진실로 현실에 닿아 있지는 않다. 협력교육이라는 대안적 비전은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없다. 초경쟁이, 게다가 초격차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협력을 말한다는 자체가 이미 현실성을 확보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현실에서 빛을 잃지 않는 연대의 힘을 발견하고 또 협력을 통해 난관을 극복하는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가슴으로부터 솟아오르는 감동을 직접 경험한다. 이러한 연대와 협력에 대한 갈망이 사회에서부터 교실에 이르기까지 지독하게 억눌려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연대와 협력이 언제나 가능하다고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안다. 협력교육은 바로 이러한 우리의 본성에서 출발한다. 오히려 협력교육은 억압으로 작용하고 있는 경쟁의 폐해로부터 학생과 학교, 사회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협력교육을 통해 협력과 경쟁이 균형을 이루어야만 경쟁조차도 비로소 그 본연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이 대학과 전공의 서열화 체계를 따르는 입시경쟁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협력교육은 경쟁교육에 뒤처지지 않겠는가? 심지어 경쟁이 지구촌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다면 협력교육은 우리 학생들의, 한국인의, 한국 경제의 경쟁력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이러한 가장 손쉬운 비판이 가장 대응하기 힘든 비판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협력과 소통을 중시하는 교육제도의 멋진 교육적 성과를 제시할 수도 있고, 혁신학교의 성공 사례를 들 수도 있고, 초·중등 공교육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역할을 강조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비판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협력교육의 실천이 교육체계 전체에 대한 혁신, 사회의 문화와 질서 자체에 대한 혁신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협력교육은 교육의 변혁적 잠재력이 현실에서 최대한 발휘되도록 하려는 사회운동이다. 이러한 협력교육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높으면 높을수록 당연히 사회적 장벽도 높을 것이다.
우리는 협력교육을 통해 어떤 사회로 나아가려고 하는가? 협력교육은 사회구성원보다는 사회 자체를,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앞세우는 길로 향하고 있지 않은가? 경쟁교육이 극단적 개인주의 사회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면 협력교육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집단주의 사회로 데려갈 수도 있다. 그러나 협력 자체가 서로 다른 개인들 사이의 협업과 분업을 의미한다면, 또 창의와 혁신이 협력을 통해 이루어진다면, 이러한 우려는 기우에 그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강요와 억압은 결코 협력교육의 방식이 될 수 없고, 또 되어서도 안 된다.
협력교육을 위한 토론과 실천
시민사회의 요구를 교육 현장에 반영하고 현실화하려는 전달자이자 실천가로서 정근식 교육감이 제안한 협력교육 패러다임이 서울교육공동체 안에서 활발한 토론을 불러일으키고 교육 혁신의 확장과 심화에 기여하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