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마당2025 봄호(258호)

[서평] 삶의 대체 경로를 탐색하며
-「크눌프」,「좀머 씨 이야기」,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이민재 (염경중학교, 교사)

삶은 종종 내비게이션이라고들 한다. 목적지를 설정하고 방향을 정하고 때론 적절한 우회로와 방향 전환을 통해 경로를 탐색하는 여정. 그렇다면 보편적인 삶의 경로란 무엇일까. 열심히 공부하여 남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학위를 걸치고 적절한 때에 가정을 이루고 ‘내집마련’이라든가 ‘자아실현’이라든가 하는 삶의 이정표를 거머쥐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편적인 삶의 경로를 택하는 이유는 그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이는 선택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경로를 밟으니까, 그들이 먼저 간 길을 좇는 것이 더 안전할테니까.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라는 경고등은 사회적으로는 낙인이며 개인적으로는 불안과 공포의 초석이다.

여기 보편적인 삶의 경로를 택하지 않는 두 명의 문학작품 속 인물이 있다. 그들의 삶의 궤적을 좇아가다 보면, ‘자연스럽다’고 여기던 삶의 경로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의문은 비단 다양한 삶을 이해할 수 있다는 포용적 관점을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의문은 나 자신을 이해시킨다. 길을 찾지 못할 때, 길을 찾고 싶지도 않을 때 스스로의 손을 부여잡고 보편성에 부합하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는 스스로의 마음을 연민하고 사랑할 수 있게 한다.

크눌프

크눌프는 안정과 물질적 부, 야망을 버리고 자유와 자연, 시를 사랑하는 방랑자이다. 젊은 시절의 그는 특유의 매력과 재치로 사람들을 매료하며 보편적인 삶을 살아가는 자들의 부러움을 사곤 했다. 그러나 병과 세월 앞에서 한없이 약해진 크눌프는 우연히 길에서 만난 동창인 의사 친구와 자신의 삶을 비교하며 신 앞에서 투정한다. 소설의 묘미는 크눌프가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한탄하는 것에 있다. 보편적인 삶의 경로를 택한 사람들이 크눌프의 삶을 부러워하며 후회하듯, 크눌프 역시도 자신이 가질 수 있었던 부, 직업, 가족과 같은 전통 가치를 못내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이 한탄은 결코 그 어떤 삶도 온전하지 않다거나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는 할 수 있다는 식의 회의주의적 결과론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크눌프의 투정에 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아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 난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었다. 나를 대신하여 넌 방랑하였고, 안주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일깨워주어야만 했다. 나를 대신하여 너는 어리석은 일을 하였고 조롱받았다. 네 안에서 바로 내가 조롱을 받았고 또 네 안에서 내가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의 자녀요, 형제요, 나의 일부이다. 네가 어떤 것을 누리든, 어떤 일로 고통 받든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했었다.”

헤세는 크눌프를 자신의 분신이라고까지 여기며 아꼈다고 한다. 그는 크눌프를 통해 우리에게 삶은 어떤 성취나 척도로도 판단할 수 없으며, 그 자체로 평등하고 아름다우니 목적과 결과가 아닌 사랑하고 경험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출 것을 당부한다.

좀머 씨 이야기

소설 “향수”의 저자로도 유명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는 전후 독일에서 자란 어린 소년의 성장기이다. 어린 소년이 처음 자전거를 배우는 이야기, 첫사랑의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 선생님께 혼나 너무 억울한 나머지 죽을 마음까지 드는 아이의 마음. 시대도 배경도 다르지만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법한 어린아이다움이 가득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좀머씨는 누구인가. 마을에 사는 이상한 아저씨, 늘 목적도 이유도 없이 지팡이와 배낭만을 가지고 끝도 없이 걷기만 하는 사람. 책 전체에서 좀머씨가 말을 하는 순간은 단 한 번이다. ‘그러니 나를 좀 내버려 두시오.’ 그러나 이 말이 어찌나 강력한지, 그리고 소년이 죽기 위해 올라간 나무 위에서 바라본 좀머씨의 모습이 얼마나 인상 깊었는지, 좀머씨의 말은 책 말미 소년의 어떤 선택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내용은 직접 읽으며 확인해 보시길!). 책에서 좀머씨는 전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참전군인이자 전쟁 피해자를 상징한다. 좀머씨가 그토록 걷는 이유 역시 짐작컨대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이다. 이렇듯 침묵하는 좀머씨와 성장하는 소년의 생생한 기억은 뚜렷한 대조를 이루지만 쥐스킨트는 두 삶의 병렬적 배치를 통해 이들 모두의 삶을 동등한 관심과 중요성으로 다룬다.

“죽을 지도 모르니, 그러니, 나를 좀 내버려 두시오.”

소년이 마지막에 하는 선택 역시 결국 좀머씨를 좀머씨대로 이해한 것이다. 이웃이나 구원, 공동체 같은 가치적·규범적 선택이 아닌 한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실존적 이해. 어린 시절 잠시나마 죽음을 고민한 소년이 한 평생 죽음을 안고 살아온 좀머씨를 있는 그대로 이해한 선택일 것이다. 쥐스킨트는 소년의 선택을 통해 삶의 표면 너머 어딘가에서 속삭이며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성을 존중할 것을, 그들의 이야기도 충분히 말할 가치가 있음을 알려준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앞의 두 인물과 다르게 이반 일리치는 우리와 같은 보편적 인물이다. 이반 일리치는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고위 판사로 출세하여 물질적 안락을 얻고 결혼하여 자식을 낳는 등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여 살아온 관습적인 인물의 상징이다. 그러나 가구를 옮기다 다친 옆구리에서 시작된 불치병은 이반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한없이 무의미 하고 공허하게 느끼게 한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가족 관계, 부인, 딸들, 동료들 그 무엇 하나 진정한 것이 없음을, 피상적인 껍질뿐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결코 관습적인 삶을 비판하거나 그러한 삶의 허영과 오만을 포착하여 조롱하고자 함이 아니다. 톨스토이는 죽음의 고통을 통해 드러난 취약한 인간의 영혼을 낱낱이 보여주며 순응으로 특정지어진 삶이 어떤 발견과 진정한 의미로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이반을 진심으로 연민하고 보살펴주는 젊은 하인 게라심의 등장은 다양한 삶이 어떤 방식으로 의미 있게 연결되는지, 진실성과 공감이라는 삶의 가치가 어떻게 인간 내면을 변화시키는지 깨닫게 한다.

 

“크눌프(Knulp), 이반 일리치의 죽음(Ivan Ilyich), 좀머 씨의 이야기(The Story of Mr. Sommer)”에서 주인공들의 각기 다른 삶은 보편적 경로를 선택하여 살아가는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삶은 관습적이든 비전통적이든, 연결되어 있든 고립되어 있든 그 나름의 고유한 진실과 의미가 있다. 2025년 새해를 맞아 새로운 결심, 새로운 도전 앞에서 우리는 또 다시 삶의 경로를 재탐색하고 목표를 설정하고 이에 부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우리 교육 역시 아이들에게 가치 있는 삶과 그 방향을 끊임없이 주입하고 아이들이 보편적인 삶의 경로를 찾기 위한 물적·심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모두가 알지 않는가. 전통적인 삶의 이정표를 거부하고 나름의 경로를 탐색 중인 아이들이 이미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삶의 표면 너머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속삭이며 살아가는 삶의 다양한 층위 역시도……. 이제는 그들의 삶이 어떤 방식으로 읽히고 말해지는지, 그들의 이야기는 또 어떻게 전해질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할 때다.